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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옆방eye : 객원블로거
* 이 글은 국립재활원에서 발행하는 '재활의 샘' 책자에 '저시력 재활의 조건' 이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기고한 글입니다. 저시력인 재활의 활성화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저시력인의 입장에서 모색해봅니다.


장애인으로 차별하지 않고 남과 똑같이 대해주어 고마운 일일까? 저시력인은 이처럼 장애인이라는 게 들어나지 않아서 살기가 고달프지만, 장애인이라는 걸 들킬까봐 겁내는 저시력인도 적지 않다.. 성인이 된 후에 아주 조금씩 장애를 겪어가는 저시력인의 대부분은 행여 누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챌까 전전긍긍이니 고달프긴 매한가지.(장애가 심각해지면 변하지만) 날때부터 저시력이라도 보기에 말짱하다면 역시 아닌 체한다. 저시력임을 밝혀봤자 정리해고 영순위가 될 테고, 1급이 아니고는 별로 덕볼 일도 없으니까 아무튼, 저시력이 되는 원인 만큼이나 복잡다단이라서 사회의 인식개선이 그 만큼 더디어진다.

실명할 수 있다는 걸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된 30 초반의 망막색소변성증 환자가 찾아왔다. 마침 같은 병의 몇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시야는 좁아졌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살만한 이도, 맹인 바로 전 단계까지 가버린 이도 있었다. 그들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보고만 이 신참은 코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진행성 안질을 앓고 있는 모든 저시력인의 희망, "내가 맹인이 되기 전에 의학이 발달하여 고칠 수 있을지도…" 한참을 울고불고 한 뒤, 정보가 아쉬운 이 신참이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절대로 저시력연합회라고 쓰지 마시고 꼭 박사님 이름으로만 편지 보내 주세요." 가족도 옆집에서도 절대로 알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어느날, 녹내장이 위험수위에 이른 중년 부인이 왔다. 장애인 등록에 대해 일러 주었더니 손사레를 쳐댔다. 남편 회사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병신을 데리고 사는 남편이 얼마나 불쌍해 보이겠어요?" 직장에서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저시력인과 정안인의 경계선, 딱 그 선상에 있는 약시 환자, 준수한 용모가 더욱 그를 멀쩡해 보이도록 하였다. 학생 때, 일등까지는 아니어도 앞쪽에서 밀려나진 않았단다. 자라는 동안 내내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다.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절대로 남의 도움도 받지 않았단다. 남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 젊은이는 언제나 독야청청. 


스스로를 이렇듯 외부와 차단 시키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차단 당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남자인지 여잔지야 분간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진 알 수 없으니 아파트 바로 옆문을 드나드는 이와 수없이 마주쳐도 언제나 초면.  "젊디젊은 것이 건방지긴."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재수딱지, 왕 싸가지로 되고 만다. 갓 학교에 입학한 저시력 아이, 제대로 뵈질 않아서 매사에 어리버리. 다른 엄마가 제 아이에게 이른다. "잰 좀 모자라는 것 같으니까 같이 놀지 마라." 두었다가 나중에 사돈 삼을 일 없을 것 같아서 그냥저냥 살고들 있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이 다 같지는 않은 법. 내가 나이 서른의 늦깎이 대학생이던 때 교정을 지나다가 몸짓이 별나게 요란한 이와 마주치곤 했었다. "자네를 인사 시키려니 어쩌겠나." 서울에 번화가라고는 명동 밖에 없던 시절,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없어진 시공관 앞길에서 어떤 이가 내 시원치 않은 눈에도 번쩍 띠리 만큼 두 팔을 있는대로 휘저으며, "어이ㅡ, 어이ㅡ" 아니 명동 한복판에서 무슨 저런 사람이… 나야 걸어가면서 발끝 아닌 한데를 쳐다볼 만용이 없어 멈추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러는 사이 그가 다가왔다. 다른 대학에서 출강 오셨던 중어 교수님. 그분들의 배려가, 이 첫눈 내려 쌀쌀한 날에 여태도 따스하다.

산다는 일이 집과 동네 마트처럼 익숙한 공간에서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 난생 처음 가는 곳을 가기도 한다. 뵈는 게 없다고 눈치마저 없진 않아서 속이 편칠 않다. 눈이 직무유기라 늘 입이 대신 바쁘다. 어딜 좀 찾아가려면 수도 없이 묻고 물어 또 다시 고쳐 묻고… 이제는 바뀐 이름 상업은행을 찾아야 했다. 점심을 들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인듯 싶은 이에게 상업은행을 물었다. 바로 그 상업은행 큰 문 앞에서. 그는 대답 대신 나를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내가 워낙 아담 싸이즈라서) 뚫어져라 날 내려보는 그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문맹은 아닐 것 같고 외국인은 절대로 아니고, 혹 정신병자? 그게 아니라면… ? '난 너무 멋지단 말이야 벌건 대낮에 작업이 다 들어오다니.' 요런 생각이라도?  골똘하기가 짝이 없었다. 아주 한참이나.

또 언젠가는, 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앞에 있다기에 계단을 올라왔더니 그 앞은 그냥 휑-, 마침 출구 반쪽을 가로막고 있던 과일 손수레 아짐씨에게 다시 물었다. 주머니에 질러넣은 손을 꺼내기 싫어 턱을 반 바퀴 휙 돌렸다가 바로 세운다. "저ㅡ기." 시야도 좁고 망막에는 거뭇거뭇 딱지가 앉아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알아채질 않는다. 달리 물어볼 사람이 없는 휑ㅡ, 귀찮아하거나 말거나 또 물었더니만, "고 앤경두 모자맨키루 멋으로 썼슈?" 이죽였을 입매가 안보여도 선하다. 이런 일 때문에 가끔, 아니 꽤 자주 "멀쩡해서 정말 미안해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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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Heo2035

길을 다니자면 이렇게 기분이 위태로워지는 건 그러려니 치겠거니와, 생명에 위협을 받을 대도 많다. 장애인들 방콕 하지 말라고 지하철 무임승차표를 준다지만, 그 지하철엘 접근하려면 전우의 시체도 아니련만 넘고 넘어야 할 것이 많기도 많다. 몇 가지를 대충만.

역세권 하고도 이동인구가 많아 복닥대는 지하철역 입구쪽 계단은 노점상들의 차지이다. 요즈음의 노점이란 자그마한 좌판을 깔아놓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계단 폭의 절반도 더 넘게 점령하고는 웬만한 점포보다 결코 적지 않은 상품을 진열한다. 주변시력이 좋은 황반변성 환자라면 모를까 보통의 저시력은 길이건 계단이건 한쪽 끝에 붙어서 다닌다. 여차 하면 손잡이나 벽을 붙잡아야 하니까. 초긴장 속에서 조심조심 발을 옮기다가 난데없이 부딪치게 되는 손수레나 넓디넓은 좌판. 비켜보려다가 자칫 발이라도 헛딛는 날에는 계단에서 떽데굴, 등짝에선 진땀이 흐른다.  최근 전노련(전국노점상연합?)의 투쟁이 격렬하다. 생존권 사수란다. 노점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받는 난 생명권을 사수 해야겠는데, 우리 전저련(전국저시력인연합회)에서도 생명권 사수 결사대를 조직해봐? 대신 투쟁하고 쟁취해줄 민노총이 없어서...

넘어야 할 전우의 시체가 노점만은 아니다. 내 사무실이 있는 영등포 청과물 시장 일대, 옆으로 옆으로 이어지는 과일가게들이 앞으로 앞으로 과일상자를 내다 쌓아 인도에는 한 뼘 땅도 남아있질 않다. 할 수 없이 차도로 내려서면, 인도와 맞닿은 차도엔 어김없이 과일을 싣고 온 트럭과 싣고 갈 승합차들이 빈 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갈길 터주는 상인 없고, 불법적치와 불법주정차를 단속하겠다고 쫓아오는 경찰도 없어 아슬아슬 차도의 2차선으로 걸어 다닌다. 물색 모르는 운전자가 빵ㅡ 빵 신경질을 부리지만, 낸들 어쩌리요 날개가 없는 것을.


>> 4편에 계속

손톱가는 여자 - 저시력 재활의 시작 1편 
손톱가는 여자 - 저시력 재활의 시작 2편 
손톱가는 여자 - 저시력 재활의 시작 3편 
손톱가는 여자 - 저시력 재활의 시작 4편 (마지막)


 미영순
시각장애 1급 / 전국저시력인연합회 회장
정치학 박사 / 중국 흑룡강성대학 객원교수

2008/05/02 10:46 2008/05/0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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