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디컬 안과 드라마(2): 운수 좋은 날
안녕하십니까. 김안과병원 녹내장전문의 황영훈입니다.
이번 군디컬 안과 드라마의 주제는 ‘운수 좋은 날’입니다.
어느 날, 모 부대 소속 상병이 갑자기 눈이 흐리게 보인다고 찾아왔습니다.
그 병사의 눈을 검사한 결과, 다음 사진에서 보이듯이 망막의 여러 곳에 출혈이 보였습니다.
마치 피부에 두드러기가 생기듯 망막 여기저기 동글동글한 붉은 출혈이 보입니다.
망막의 여러 곳에 출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발생하는 당뇨망막병증입니다.
하지만 당뇨망막병증에서 나타나는 망막출혈은 이 경우와 양상이 다릅니다.
젊고 건강한 병사에게 왜 망막출혈이 발생했을까요?
눈을 어딘가 심하게 부딪혔을까요? 최근엔 그런 적 없다고 합니다.
망막출혈은 약물치료 하면서 흡수되기를 기다리면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고 혈액검사를 했는데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각종 혈액관련 수치가 엉망입니다.
당장 혈액내과 전문선생님에게 협진을 의뢰했고,
혈액내과 선생님의 진단은 ‘백혈병’이었습니다.
백혈병은 혈액을 구성하는 세포에 이상이 생기면서 정상적인 혈액 세포들이 담당하던 영양분 공급, 감염에 대한 방어, 출혈을 억제하는 기능이 저하되는 병입니다. 이 병사의 경우, 출혈을 막는 혈소판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망막 여기저기 출혈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백혈병은 젊은 사람에게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질병입니다. 하지만 현역 육군 병사가 입대해서 상병이 될 때까지 백혈병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그간 유격, 행군, 진지공사, 그리고 축구 하면서 수 없이 몸 여기저기에 충격을 받았을텐데 어떻게 멀쩡하게 지냈을까요…
누구나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행복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질병과 동행해야 한다면 그 질병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다정하게 만나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신사적이지 못해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인턴시절, 어린 학생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병원 응급실로 왔습니다. 이미 응급실에 왔을 때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바로 머리 CT를 찍었는데 머리 속이 온통 출혈로 가득했습니다. 피가 가득한 학생의 CT 영상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 놓고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그 장면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 학생 역시 혈액검사에서 백혈병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서 수술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학생은 이미 의식을 잃었고…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다른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백혈병… 왜 누구에겐 그렇게 험악하게 나타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슬며시 나타난 것일까요… 그런 점에서 이 병사의 백혈병 발견은 그나마 운수가 좋은 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흐리게 보인 그 날은 그 병사에겐 어쩌면 ‘운수 좋은 날’일지도 모릅니다.
그 병사는 결국 의병전역을 했고, 혈액내과에서 백혈병 치료도 잘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망막출혈도 좋아져서 시력도 회복되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다음 에피소드로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