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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야기 (4): ‘바가텔 Op. 126’

이번 시간엔 베토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곡 중의 하나인 6개의 바가텔, 작품번호 126번에 대해서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언젠가 제가 썼던 감상문을 소개 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다소 감상적이고 주관적인 글이지만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숨겨진 매력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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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이 곡을 왜 그냥 지나쳤을까...' 몇 해 전 4월의 어느 따스한 봄날, 우연히 알프레드 브렌델의 에로이카 변주곡 음반을 듣다가 함께 수록된 Op.126의 3번을 들었을 때 문득 떠오른 생각... 분명 이 음반을 그간 여러 번 들었을텐데... 꼭 이 음반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곡의 다른 음반들도 여러 가지인데 어떻게 그 동안 이 곡의 매력을 모르고 지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일까... 사람사이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항상 곁에 있어서 별 생각 없이 지내던 사람들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할 때 느끼는 반가움, 놀라움... 몇 시간을 Op.126-3만 계속 들었다. 빌헬름 켐프, 알프레드 브렌델, 아나톨 우고르스키, 글렌 굴드, 멜빈 탄, 아르투르 슈나벨, 그리고 스테판 코바세비치의 연주로... 흡사 32번 피아노 소나타 2악장의 축소판과 같은 이 곡은 악보로 두 바닥밖에 되지 않는 짧은 곡이지만 그 행간에는 무수한 사연들이 숨어있다. 대부분의 베토벤 후기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수줍게 내딛는 듯한 주제의 제시와 트레몰로 속에 아련히 저음부에서 떠오르는 주제 제시법, 그리고 고음부의 높게 날아오르는 듯한 멜로디를 거쳐 조용히 사라지는 피날레까지... 불가(佛家)에 전해오는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도는 듯한 명상적이고 차분한 곡... 중기의 삶과의 치열한 전쟁을 거쳐 '애달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는' 저 피안(彼岸)에 도달한 베토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용이 타이르는 듯한 느낌의 곡... 기교적으로 많이 어렵지는 않으니 Op.126-3 이 한 곡이라도 열심히 연습해서 정말 '제대로'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곧바로 악보를 구해서 몇 번 연습 해보다가 흐지부지하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언젠간...

아직 잘 모르지만 아마도 베토벤의 중기음악과 달리 후기음악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수용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예술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탁마(琢磨), 명예에 대한 욕구, 사랑에 대한 욕구, 조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경제적인 욕구, 건강에 대한 소망으로 항상 목말랐던 베토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보다 힘겹고 굴곡 깊은 삶을 살았던 베토벤이 말년이 되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행여나 '가진 것(혹은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삶이 힘들어진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은 아닌지... 젊은 시절 투쟁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들, 신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마저 모두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불이(不二)를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거늘... 마음 아파하는 '나(我執)'를 버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 순간(放下着), 어쩌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을지도... 그렇게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하고 뒤돌아 본 끊임없는 투쟁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상의 노래. 지금 이 순간에도 탐진치(貪瞋痴)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현자(賢者)가 들려주는 위안의 노래...

<소중한 연주들...>

피아노 소나타나 대규모 변주곡들처럼 널리 알려진 곡이 아니라 그런지 이 곡의 연주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되는 '대표적인 명반'은 없는 듯하다. 우선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연주는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964, DG)의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은 연주이다. 가끔 켐프의 연주를 접하다 보면 고도의 테크닉이나 체력이 요구되는 대규모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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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보다 소곡들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베토벤의 소곡들을 담은 이 음반은 바흐의 소곡들을 담은 음반과 더불어 켐프가 남긴 수많은 음반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음반이 아닐까 싶다. 켐프와 비슷한 스타일을 견지하는 듯하지만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을 주는 스테판 코바세비치(Stephen Kovacevich, 1994, EMI)의 연주도 역시 너무나 멋진 연주. 마치 켐프의 수정이 원석에 가깝다면 코바세비치의 연주는 섬세하게 가공된 수정과 같다고나 할까... 아나톨 우고르스키(Anatol Ugorski, 1991, DG)의 연주는 여태껏 접해본 이 곡의 연주들 중에서 가장 표정이 풍부하고 감성적인 연주이다. 연주시간도 다른 연주자들에 비해서 현저히 길다. '피아노계의 첼리비다케'라고 부르면 어떨지... 켐프와 코바세비치의 연주가 ‘절제의 미학’이라면 우고르스키의 연주는 ‘풍부한 서정성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 1984, Philips)의 연주 또한 이 곡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매력적인 연주이다. 소박하고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브렌델의 연주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1937, Naxos)의 다소 오래된 연주는 고색창연한 느낌이 나름 매력적인 사색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이다. 글렌 굴드(Glenn Gould, 1974, Sony)와 멜빈 탄(Melvyn Tan, 1992, Virgin)의 연주도 색다른 묘미를 준다. 굴드는 워낙에 파격적인 연주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베토벤의 이 소곡들 앞에서는 얌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에서 너무나 멋진 '칸타빌레(cantabile)'를 들려줬던 굴드이기에 그 어떤 곡보다 '칸타빌레'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 소곡들에서도 나름 멋진 연주를 들려준다. 멜빈 탄의 포르테피아노 연주는 색다른 묘미를 주기는 하나 다른 연주들만큼 깊이 있는 맛은 덜한 듯하다.

<에필로그의 의미...>

이 곡에 대해서는 만족할만한 해설서를 찾아보기 힘들다. 논문을 검색해보아도 국내에서는 피아노 전공자들이 쓴 학위논문 몇 편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베토벤 관련 서적들도 이 곡을 베토벤의 후기 음악을 언급하면서 한 두 줄 정도로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 어쩌면 베토벤 자신도 별 사심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헌정(dedication)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시기가 1823-1824년으로 한참 9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기이니 어쩌면 이 곡은 9번 교향곡(외부로의 이상주의적 인류평화에 대한 강변) 이후 후기 현악4중주의 시기(내면의 고백과 사색)로 건너가는 변환기의 마지막 끝자락쯤에 위치하는 곡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1822년 32번 피아노 소나타를 끝으로 32곡이라는 피아노 소나타 작곡의 대장정을 끝낸 베토벤이 '32권짜리 장편소설'의 끝에 덧붙이는 '에필로그(epilogue)'로 봐도 좋을 듯하다. 자고로 어떤 책이건 에필로그를 접할 때면 아련한 감상에 젖어들기 마련인데 하물며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라는 엄청난 스토리의 끝에 찾아온 에필로그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지...

6곡의 소곡들은 외향적인 2,4,6번과 내향적인 1,3,5번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마치 32번 소나타의 외향적이고 강인한 1악장과 사색적이고 차분한 2악장처럼... 그 중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은 1번과 3번. 베토벤 자신이 이야기했던 "더욱 간명하게! 본질을 말하라! 그 외에는 침묵하라!"는 문구의 결정판이 아마도 이 두 곡이 아닐까 싶다. 연주시간은 3분내외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어떤 다른 곡들보다도 함축적이고 매력적이다. 베토벤의 다른 곡들이 소설이나 수필이라면 이 곡들은 짧고 간결한 시구(詩句)라고나 할까... 나만의 비약적인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특히 3번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도 언젠간 추억만 남기고 사라질 봄날과 같은 것이고, 영원히 내 손에 머물 것만 같은 재물도 해가 뜨면 사라질 이슬과 같은 존재이니 부디 집착하지 말라. 세상에 부러워할 것 하나 없고, 자랑스러워할 것도 하나 없다.'는 선승(禪僧)들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하다.

베토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성스러운 예술에의 헌신'과 '타인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간결한 소곡들이야말로 성스러움과 위안을 모두 느끼게 해주는 베토벤 음악의 결정체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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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가텔(Bagatelle)이란 '피아노를 위한 소품'이라는 뜻입니다. Bagatellen은 bagatelle의 독일식 복수형 표기입니다. 아마도 전세계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듯한 저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도 베토벤이 작곡한 바가텔 중의 한 곡(WoO.59)입니다. 베토벤이 작곡한 바가텔은 그 외에도 Op.33, 119, 126 등이 있습니다.

* Op는 opus라는 말의 약자로 흔히 작품번호 앞에 붙이는 말입니다. 작곡가에 따라 몇 가지 다른 번호의 단위가 있는데 베토벤의 경우 대부분의 작품에는 Op를 붙이고 그 외의 곡들에는 WoO (Werke ohne Opuszahl)이나 음악학자인 Hess의 분류에 따라 Hess라는 말을 붙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베토벤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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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과 베토벤을 사랑하는 안과의사
2012/09/17 13:07 2012/09/1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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