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3번 교향곡
베토벤의 3번 교향곡은 ‘초기-중기-후기’로 이루어진 베토벤 음악의 3단계 중에서 '투쟁과 승리'의 모티브로 요약되는 중기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곡이자 그를 절망에 빠트린 가혹한 운명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곡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1악장 시작부터 상당히 전투적이고 강인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첫 마디부터 등장하는 강력한 서주는 당시 모차르트, 하이든 풍의 조용한 서주에서 탈피한 베토벤만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이정표와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저에겐 1악장이 '베토벤과 운명의 정면대결'로 느껴졌습니다. 저 유명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과정 중에서 '부정과 분노'의 시기에 해당하는 악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베토벤도 운명과의 싸움에 지친 것일까요... 치열한 투쟁 끝에 찾아오는 2악장은 깊은 슬픔의 세계입니다. 부정과 분노를 거쳐 '우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3번 교향곡뿐만 아니라 12번 피아노 소나타나 7번 교향곡에서도 ‘장송행진곡’의 모티브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흐느끼는 듯한 무거운 발걸음의 2악장이 끝나고, 3악장에서 조금씩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는 4악장은 기쁨에 가득찬 승리의 노래입니다. 운명과의 투쟁의 결론으로 '승리'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은 베토벤 중기음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3번 교향곡의 4악장은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악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아래 그림, 작곡 중인 베토벤).
서울대병원 정신과 조수철 교수님은 베토벤의 3번 교향곡에 대해서 "교향곡의 역사에 있어서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인 면에 있어 가히 혁명적인 역할을 한 곡이며,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원초적인 영웅상'을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하였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생(부활)이라는 원초적인 주제가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3번 교향곡을 작곡한지 13년 뒤인 1817년의 대화기록을 보면 베토벤 자신도 이 3번 교향곡을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극복한 성취감을 평생 잊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베토벤 3번 교향곡의 구체적인 음악적인 내용, 형식, 주제 전개 방식에 대해서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베토벤 3번 교향곡에 대해서 깊이 있는 해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George Groove의 'Beethoven and His Nine Symphonies'를 읽어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베토벤 3번 교향곡의 명반들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도 감독과 배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듯 교향곡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베토벤 3번 교향곡 음반은 100가지 정도인데, 그 중 제 개인적인 기준에서 베스트 음반을 연주 스타일에 따라 선정해보았습니다(아래 그림, 추천음반의 표지들).
1. Otto Klemperer / Philharmonia Orchestra: 클렘페러는 어쩌면 베토벤과 닮은 점이 많은 지휘자인지도 모릅니다. 여러 질병과 사고를 겪고도 불사신처럼 매번 재기에 성공한 점이 그러하고, 강한 신념의 소유자였다는 점도 그러합니다. 클렘페러의 베토벤은 무뚝뚝하고 중후한 느낌이 강합니다. 묵직하고 강인한 스타일의 연주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클렘페러와 비슷한 스타일의 연주로 Wilhelm Furtwangler, Franz Konwitschny, Hermann Abendroth의 연주가 있습니다.
2. Herbert von Karajan / Berliner Philharmoniker: 카라얀이 베를린필과 함께 한 베토벤 3번 교향곡 음반은 그가 빈필과 함께한 브루크너 7번 교향곡 연주와 더불어 최고의 유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필의 세련된 음색과 일사불란한 합주력은 ‘카라얀식 조탁미(彫琢美)’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카라얀은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4번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남겼는데 3번 교향곡은 80년대 연주를 최우선으로 추천 드립니다.
3. Carlo Maria Giulini /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어쩌면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 꼭 거칠고 치열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노래하듯 부드럽고 유연한 3번 교향곡 연주를 들려주는 줄리니의 음반은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온화하고 가정적이었던 줄리니의 인품, 그 자신이 비올라주자였던 경력이 그러한 연주 스타일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음반은 빈필과 함께한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 LA필과 함께한 슈베르트 4번, 8번 교향곡 음반과 함께 줄리니의 대표적 명반입니다.
4. Jordi Savall / Le Concert des Nations: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연주이지만 아쉽게도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발과 르 꽁세르 드 나시옹은 빠른 템포와 날렵한 프레이징으로 군더더기 없이 compact하고 명료한 연주를 들려줍니다. 연주단체의 놀라운 합주력과 집중력, 지휘자의 통찰력이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3번 교향곡의 베스트 음반입니다.
음악을 글로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음악’ 이라는 장르의 예술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찾아 듣고, 느끼는 방법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굳이 제가 소개해 드린 음반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이나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를 이용해서 베토벤의 3번 교향곡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실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시길 권유 드립니다.
다음 편인 녹내장센터 황영훈의 베토벤 이야기 (3): ‘비엔나에서 베토벤을 만나다’에서는 직접 베토벤이 활동했던 비엔나로 찾아가서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