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안과병원 녹내장 전문의 황영훈입니다.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베토벤의 삶과 음악'에 대해서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그 첫번째 순서로 오늘의 주제는 '베토벤의 음악인생'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절망의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대하는 사람들의 선택은 다양합니다. 끊임 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인생...
복잡해 보이는 선택들도 결국 요약하자면 두 가지 경우입니다. 맞서거나 피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순간을 피하기 보다는 당당히 맞서서 이겨내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성취감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망 앞에서 정면대결을 택하여 치열한 투쟁 끝에
그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힘을 내고 위안을 받습니다.
의사의 입장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절망의 순간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그 동안 각종 질병과 사고로 실명이라는 절망을 만나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필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절망에 대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안과의사인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스스로 해답을 찾아낼 수 없을 땐 인생 선배님들의 유산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질병의 고통이라는 절망을 음악이라는 예술로 승화시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람...
바로 독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입니다.
베토벤의 고통
베토벤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부터 타계하는 순간까지 정신적,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은 순간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 스스로도 "(신체적 고통 때문에) 절망감에 빠지고,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이야기 했을 정도입니다(1817년). 잘 알려진 대로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 자신이 쓴 글들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베토벤은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했고, 대인관계도 아주 서툴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생 여러 여인들을 사랑했고, 그녀들에게서 어머니의 사랑을 찾으려 했지만 한결같이 비극적인 사랑으로 남았습니다. 베토벤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기록상에 남아 있는 그의 신체적 문제만 해도 간경변, 복수, 황달, 반복되는 복통과 설사(typhoid fever? ulcerative colitis?), 근시와 심한 눈의 통증, 관절염(rheumatoid arthritis? gout?), 잦은 고열, 납중독, 그리고 청각이상까지 그야말로 ‘종합병원’ 수준입니다. 그 많은 질병들 중에서 베토벤을 가장 절망에 빠트린 것은 바로 청각이상 이었습니다.
여러 기록을 살펴봤을 때 베토벤에게 청각이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그의 20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한참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고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문득 찾아온 치명적인 질병...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한 번에 앗아가는 질병의 등장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청각이상에 의한 고통을 로망 롤랑(Romain Rolland)은 "1796년과 1800년 사이에 귓병은 매우 심각했다. 밤이나 낮이나 귀 울림이 그치지 않았고 몸은 장 질환으로 지치고 시달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청각은 차차 약해져 갔다. 몇 년 동안은 누구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그 사실을 숨기고 지냈다. 치명적인 병을 남에게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하여 사람을 피했고, 이 무서운 비밀을 숨기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고 표현했습니다(아래 그림, 30대의 베토벤).
결국 고통에 시달리던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비엔나(Wien) 근교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해답을 찾기 위해 처절한 성찰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 고민의 흔적이 바로 1802년에 작성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입니다(아래그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양식은 유서이지만 실제로 자살을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고 '가혹한 운명에 좌절하는 베토벤'에서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베토벤'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베토벤은 유서를 작성한 직후 비엔나로 다시 돌아와서 그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곡들을 발표하면서 그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바로 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이후의 시기가 베토벤의 '중기'시대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인생
음학자들은 베토벤의 인생을 크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눕니다.
초기는 여러 스승님들에게 음악에 대해서 배우고,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가는 시기이고,
중기는 3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시기로, 청각이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처절한 투쟁을 통해 이겨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출하는 시기입니다.
후기는 40대 후반에서 타계할 때까지 약 10년의 세월로 이 시기에는 청각이 심각하게 소실되어 마치 선승(禪僧)들이 속세를 떠나 화두참선 에 정진하듯 외부세계와 단절한 채 내면의 세계로 침잠(沈潛)해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에 도달한 베토벤이 젊은 시절, 극복과 투쟁의 대상이었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시기이기도 합니다(아래 그림, 50대의 베토벤). 그래서인지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특히, 피아노 소나타 29-32번, 현악사중주 12-16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오한 매력이 있습니다. 덕분에 1번부터 32번까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쭉 듣다 보면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열정적이었던 한 사람의 젊은 시절 재기 발랄한 모습과 꿈에 부푼 모습(초기), 청각이상 이라는 절망에 대한 치열한 투쟁과 분노, 운명과 맞서 싸워 이겨낸 성취감(중기), 그리고 마침내 절망마저 인생의 일부로 수용한 해탈의 경지(후기)를 모두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베토벤이 청각장애라는 절망을 극복하고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한 중기시대의 서막을 장식한 곡이자,
제가 베토벤의 교향곡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3번 교향곡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