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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 이야기(7): ‘내 시신경은 몇 퍼센트 손상되었나요?’


최근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녹내장을 진단 받는 장면이 방송되었습니다. 안과 선생님이 환자의 시신경 모양을 검사 장비로 들여다보더니 “시신경의 80%가 손상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환자가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방송 이후로 환자들 중에서 “방송에선 몇 퍼센트라고 금방 알던데 나는 몇 퍼센트나 시신경이 손상되었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면 “너는 왜 그런 것도 모르냐. 척 보면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십니다.


“시신경의 80%가 손상되었다”고 이야기 하려면 완전히 건강한 시신경의 두께가 100 마이크로미터이고, 완전히 실명된 시신경의 두께가 0 마이크로미터라고 가정 했을 때 지금 환자의 시신경두께가 20 마이크로미터 정도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지금 시신경 두께가 70 마이크로미터 라면 몇 퍼센트 손상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걸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의 녹내장이 생기기 전 시신경의 두께와 완전히 실명되었을 때의 시신경 두께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과거로 돌리지 않는 한 녹내장이 생기기 전 시신경의 두께는 대부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실명된 상태의 시신경 두께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따라서 ‘나의 시신경이 몇 퍼센트나 손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가 정답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평균 값으로 대략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편차가 커서 참고치 이상의 큰 의미는 없습니다.


시신경의 두께를 측정하지 않고, TV에 나온 것처럼 겉모양만 보고 몇 퍼센트나 손상되었는지 아는 것은 더군다나 어려운 일입니다. 시신경의 모양을 보고 파악한 시신경유두 함몰비(c/d ratio)를 시신경의 손상 정도를 대변하는 지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몇 퍼센트가 손상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히 실명된 경우의 시신경유두 함몰비를 1.0으로 가정한다고 해도, 녹내장이 생기기 전 정상의 상태에서 시신경유두 함몰비가 0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시신경유두 함몰비와 녹내장의 정도는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시신경유두 함몰비가 0.3이라도 녹내장이 생기는 경우가 있고, 시신경유두 함몰비가 0.8이라도 정상인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녹내장이 의심되어 제 진료실을 방문해서, 정밀검사 후 녹내장을 진단받은 환자가 며칠 뒤,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첫 마디가 “지난 번에 선생님이 검사 결과를 하나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아서 다시 방문 했어요”입니다. 분명히 시야 검사 결과를 화면으로 보여 드리고, 녹내장의 종류, 안압, 지금 상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 드렸는데 무엇이 불만인가 여쭤 봤더니 시신경유두 함몰비(c/d비)와 각막두께(CCT), 빛간섭단층촬영(OCT) 검은 선의 높이(망막신경섬유층 두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불만이라고 하십니다. 이 경우와 비슷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정보를 보고 오시는 것 같은데 자꾸 환자분들께서 메모지에 그 항목들을 써 오셔서 ‘왜 알려주지 않냐’고 하셔서 이번 기회에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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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신경유두 함몰비 & 중심각막두께

우선 시신경유두 함몰비는 말씀 드렸다시피 사람마다 편차가 크고, 녹내장의 정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굳이 환자 입장에서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야검사와 시신경 상태를 종합해서 ‘초기, 중기, 후기, 말기’ 중에 어느 정도인가로 판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간편합니다. 중심각막두께는 안압 측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서 꼭 필요한 검사이긴 하지만 역시나 환자가 알 필요가 없는 값입니다. 그 이유는 중심각막두께를 이용한 안압 보정 공식 자체가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중심각막두께를 이용한 안압 보정 공식이 여러 종류 제시되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입증 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녹내장 학회 선생님들께 여쭤 보면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도 많으시고, 서로 다른 공식을 사용하고 계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녹내장 위험률 계산 공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실제 진료 볼 때 사용하는 선생님이 거의 없습니다. 그럴 듯한 공식으로 안압을 계산해서 제시한다면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환자분께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외래에서 안압을 중심각막두께를 이용해서 계산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단지 각막이 두꺼운지 얇은지 참고할 뿐입니다. 정말 중심각막두께가 궁금하다면 ‘나의 각막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두꺼운 편인지, 얇은 편인지’ 정도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2. 빛간섭단층촬영의 검은 선 높이(망막신경섬유층 두께)

이 역시 사람마다 편차가 커서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기계에서 친절하게 정상은 초록색, 비정상은 노란색, 빨간색으로 구분해서 보여주니 검은 선이 초록색 아래로 내려가면 비정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색깔을 구분하는 기준은 정상인 몇 백 명의 자료인데 시신경의 주행경로가 다른 사람과 다르거나 근시가 있는 경우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실제로 빛간섭단층촬영의 검은 선 높이를 이용해서 녹내장을 진단해봤더니 약 30%에서 녹내장을 진단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안과 학술지인 Ophthalmology에 출판되었습니다. 따라서 빛간섭단층촬영의 결과 역시 여러 변수를 고려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안과 전문의가 해석해야 합니다. 간혹 ‘검은 선의 높이가 지난 번보다 올라갔으니 녹내장이 좋아진 것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제 경험 상 망막신경섬유층이 두꺼워지는 경우는 녹내장의 호전보다는 모두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또한 국제 학술지에 계속 논문으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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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hthalmology에 출판된 논문의 초록

 


안과 의사들이 굳이 시신경유두 함몰비, 중심각막두께, 빛간섭단층촬영 검은 선의 높이를 말씀 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들까지 아는 것이 환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비행기를 탈 때 온갖 조종석 계기판에 있는 숫자들을 승객이 다 알 필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걱정하시는 것보다 믿을 만한 의사의 의견을 따르시는 편이 훨씬 행복해지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 제 환자들 중에도 처음에는 오실 때마다 숫자 하나하나 신경 쓰시다가 언제부턴가 그냥 “괜찮으시네요”라는 말 한 마디에 서로 웃고 지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현명한 녹내장 환자-좋은 녹내장 의사’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 말이 많다고(설명을 자세히 & 많이 한다고) 좋은 의사는 아닙니다. 환자 이야기 잘 듣고,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이야기 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환자분들은 제가 지난 번 편지에서 말씀 드린 네 가지 항목인 1) 녹내장의 종류(순한 녹내장인지 독한 녹내장인지), 2) 안압 정도, 3) 녹내장의 정도(초기, 중기, 후기, 말기), 4) 진행 상태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제가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지 않는다고 저를 ‘불친절한 의사’로 오해하시지는 말아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그래도… 굳이 ‘나의 시신경이 몇 퍼센트 손상되었는지 꼭 알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에게 한 가지 팁을 알려드리자면 여러 검사 값들 중에서 시신경의 손상 정도를 퍼센트로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지표는 시야검사에서 나오는 녹내장시야지표(visual field index)입니다. 그 범위가 100 (완전 건강)에서 0 (완전 실명)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녹내장시야지표 값이 20%로 나왔다면 ‘나의 시신경 기능이 80% 손상되었구나’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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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시야지표로 나타낸 시신경 기능의 퍼센트를 보여 주는 실제 사례들


물론 제일 좋은 건 그런 복잡한 건 안과 전문의에게 맡기시고 환자분은 그 시간에 행복한 생각 하시는 것이겠죠… 사실 이런 정보를 알려드리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환자에겐 새로운 집착(혹은 걱정)일 수 있고, 비전문가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게 악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은 의학정보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주위에서 들리는 말에 현혹되지 마시고, 본인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취사선택하셔서 중용(中庸)을 잘 시키시는 행복한 환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Writer profile
녹내장과 베토벤을 사랑하는 안과의사
2015/01/22 15:02 2015/01/2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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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내장환자

바쁘신 중에도 시간 내어 이런 좋은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진형

선생님의 좋은글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궁금한게 있습니다. 스트레칭 클래스를 하고 있는데 엎드린자세로 상반신 앞가슴과 고개를 을 살짝 들고 다리를 살짝 드는 스트레칭 (메뚜기 자세라고 하던데)과 누운자세에서 앞가슴위부분을 살짝드는 윗몸일으키기도 녹내장 환자는 금해야 하나요? 오래하는 것은 아니고 5분여 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굴 이 벌게질정도로 힘들게 하지않구요.
조언부탁드립니다.

황영훈

안녕하세요. 부족한 글 잘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운동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데 말씀하신 정도의 운동은 크게 지장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일 조심해야 하는 운동은 두 가지 자세입니다.

첫째는 누워서 역기를 드는 것입니다. '누운자세' + '무거운 물체 드는 것'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팔이나 어깨 근육 운동을 하시겠다면 앉거나 서서 하는 것이 안압 상승을 예방하는 면에서 더 유리합니다.

둘째는 물구나무 서기 자세입니다. 특히 허리 안 좋은 분들이 거꾸로 매달리는 자세를 좋아하시는데 꼭 하셔야 한다면 가급적 시간을 길지 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두 가지 자세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운동은 크게 무리 가지 않으니 괜찮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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